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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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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2014년 03월 01일 12시 09분  조회:6169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왕궁에 갇힌 캄보쟈의 허수아비 왕



 
 
해가 지고 마지막 남은 관광객들마저 떠나면 노로돔 시아모니 캄보쟈(캄보디아)국왕은 동화속에서나 나올것 같은 왕궁에서 쓸쓸히 혼자가 된다.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만 자리이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안해도 없고 자녀도 없다. 원하지 않았던 왕위에 올라 아무런 권력도 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하루하루를 고독하게 보내고있는 그는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다. 혼자가 된 이 시간에 그에게 남은것은 마지못해 왕이 되기전에 보냈던 행복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전부일것이다.

노로돔 시아모니는 1953년 5월 14일에 캄보쟈의 수도 프놈뻰(프놈펜)에서 노로돔 시아누크 전임국왕과 여섯번째 왕비인 모니니아트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1965년에 프놈뻰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체스꼬의 수도 쁘라하의 한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후 1975년까지 쁘라하음악예술박사학원에서 고전음악과 고전무용을 전공하였다. 1976년에 조선에 가서 영화촬영에 대해 공부하고 1977년에 캄보쟈로 돌아왔다. 그러나 크메르루주정권에 의해 1979년까지 다른 왕실가족과 함께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1981년 발레를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의 빠리로 갔고 그곳의 모자르트음악학원에서 고전무용과 고전음악을 가스치는 교수로 활동하면서 거의 20년동안 프랑스에서 지냈다.

1993년에 빠리에 본부를 둔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캄보쟈대사로 임명되여 국왕즉위 직전까지 활동하였다. 2004년 10월에 60년이상 왕위에 있으면서 캄보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노로돔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에서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그해 10월 29일에 그는 프놈뻰에 가서 캄보쟈의 국왕으로 되였다.
시아모니의 아버지 시아누크는 다재다난(多灾多难)했던 캄보쟈와 함께 파란곡절을 겪어온 인물이다.

캄보쟈에서는 1~6세기에 부남왕국이 섰고 9세기초에 자야바르만 2세가 전국을 통일하여 앙코르왕국을 세웠다. 앙코르왕국은 14세기부터 세력이 약해져 주변국가들의 영향을 받다가 1863년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였으며 왕의 제도는 계속 존속되였다. 시아누크는 1941년 4월에 조부인 국왕 모니본이 사망되자 왕위에 즉위하였다. 당시 캄보쟈는 프랑스의 보호국이였다. 캄보쟈의 독립을 념원하고있던 그는 194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1949년에 프랑스련합내에서 캄보쟈독립을 획득하였다. 1955년 3월에 왕위를 아버지 수라마리트에게 양위하고 9월에 총선거에서 압승하여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정치를 쇄신하고 대외적으로는 중립주의 외교를 표방하였다. 1960년에 국왕인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왕위계승을 하지 않고 국가원수로 취임했다. 그렇게 되여 캄보쟈는 립헌군주국이지만 왕이 없는 상태로 되였다.

시아누크는 1961년에 라오스국제회의를 제창하고 중립화에 공헌하였다. 1970년 3월에 그가 외국방문을 가났을 때 우파인 론놀 등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그의 국가원수직을 박탈했다. 중국으로 망명간 그는 그해 5월에 북경에서 캄보쟈민족련합정부를 세우고 망명정권의 수반이 되였다. 1975년에 크메르루주군(軍)이 내전을 일으키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그해 9월에 시아누크는 그들의 지지을 받고 귀국하여 국가원수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76년 4월에 크메르루주가 독재를 강화하자 피박에 못이겨 사임하고 다시 중국과 조선에 들어가 망명객으로 머물렀다. 1979년 2월에 윁남군은 헹 삼린정권을 앞세우고 캄보쟈를 장악했다. 시아누크는 윁남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1982년에 반윁남파가 집결하여 수립한 민주캄보쟈련합의 불안정한 망명련립정부의 대통령이 되였다. 국외에서 국가회복운동의 지도자로서 투쟁을 계속해오다가 1991년에 귀국하여 과도정부인 캄보쟈민족평의회의 의장에 선출되였다. 1993년 9월에 립헌군주제로 환원하는 헌법개정을 하자 그는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캄보쟈의 국왕이 되였다. 하지만 망명객이 된후부터 시하누크에게는 실권이 없었다.

시아누크가 실질적인 권한을 통치한 기간은 캄보쟈가 독립한 1953년 11월 9일부터 1970년 3월 18일까지였다. 1993년 5월 총선에서 시아누크의 둘째 아들 라나리드가 제1총리로 선거되여 권력을 쥐였으나 1997년에 제2총리인 훈센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라나리드를 국외로 추방하고 단일 총리가 되여 현재까지 실권을 장악하고있다.

훈센은 2004년 10월에 시아누크국왕이 건강상의 리유로 양위할 뜻을 밝히자 국왕선출위원회로 하여금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는 시아모니를 새 국왕으로 선출하게 했다. 시아모니는 왕위서렬로 보면 아홉번째였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다는 리유로 순조롭게 새 국왕으로 선출되였다. 하지만 시아모니는 즉위한 날부터 왕궁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었다. 

그를 가둔 장본인은 다름아닌 명민하고 술수에 능하며 무자비한 정치인으로 소문난 훈센총리라고 할수 있다. 캄보쟈의 모든 실권을 손에 쥔 훈센총리의 권력은 왕궁에까지도 뻗쳐있다. 시아모니는 즉위 다음날에 성명을 발표하여 “나는 립법, 행정, 사법 등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서 중립을 지키며 어떤 정치인물이나 정당의 편에도 서지 않을것이다”고 선포했지만 훈센은 그에 대한 감시를 줄곧 늦추지 않았다. 시아모니국왕은 정부가 파견한 감시인들에게 둘러싸여있다. 왕실담당장관인 콩솜올은 훈센의 측근인데 감시인들을 총괄지휘하고있다. 국왕은 왕궁담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하며 어쩌다 나갈 경우에도 감시인들이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또 언론의 접근은 일체 차단되여있다.

캄보쟈헌법은 왕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고있지만 실제로는 이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고있다. 야당의원으로 캄보쟈에서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몇사람중의 하나인 손치헤이는 “왕의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허수아비왕’이다”라고 말했다.

캄보쟈에서 왕의 위상이 언제나 이랬던것은 아니다. 시아모니국왕의 부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는 수십년동안 이 나라에서 거인처럼 군림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고 그의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면 불꽃놀이행사를 보기 위해 수만명이 왕궁앞광장에 몰려들군 했다. 아마도 이런 시아누크의 존재로 하여 훈센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는 시아모니이지만 안심하지 못하고 항상 경계하고있는지로 모른다.

시아모니가 국왕에 즉위한지도 7년이 지났다. 지금 캄보쟈국민들은 시아모니국왕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슬프고 외로우며 버림받았다”와 같은 말로 국왕에 대한 측은한 감정을 내비치고있다. 시아모니국왕은 58세로 매일 매일을 서류를 결재하고 손님들을 접견하는 일상적 업무로 보내고있다. 그런 다음 식사하고 책을 읽는것이 생활의 거의 전부이다. 6명의 부인과 수많은 정부를 뒀던 부친과 달리 시아모니국왕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왕위계승자를 남길것 같지도 않다.

최근에 있었던 그의 생일은 거의 누구도 모른채 조용히 지나갔으며 궁안에서조차 특별한 행사가 없었다. 왕궁에 있는 젊은 시종인 신치헤이는 “국왕이 선량하고 점잖으며 캄보쟈의 상징이지만 문제는 아무런 권력이 없다는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훈센이 캄보쟈의 실질적 왕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했다.

시아모니는 모국어외에 프랑스어, 체스꼬어, 영어, 로어에 정통했다. 여러 나라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국왕이 손님들과 현지어로 대화를 나눌 때면 이를 엿들으려는 주변감시인원들은 짜증을 낼 정도라고 한다.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권력에 대한 야망이 전혀없는 시아모니가 왜서 왕위에 순순히 올랐을가? 내막을 하는 사람들은 시아모니국왕은 왕실을 계속 존속시키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때 어쩔수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고 말했다.

시아모니는 2005년 8월에 중국에 국사방문을 왔고 2008년 8월에 제29기 북경올림픽운동대회의 해당활동에도 참석했다. 그후 해마다 중국방문을 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감시일군들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2천년에 달하는 캄보쟈왕실의 마지막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 발레무용수였던 그에게는 거칠고 험난한 조국의 정치무대보다 유럽의 예술무대가 더 적합했을것이다. 시아모니는 어릴 때부터 누나인 보파데비공주(시아누크의 맏딸)와 함께 고전무용을 배웠고 14살 때에는 아버지 시아누크가 제작한 영화 《꼬마왕자》의 주인공역을 맡기도 했다. 시아모니는 그때를 회상하며 예술무대에서 활동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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